1. 국가 폭력과 인간성의 파괴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말해지지 않아서는 안 되는 진실 사이에서 독자를 멈춰 세웁니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과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담담하면서도 처절하게 그려 냅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재현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기억, 그리고 문학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열다섯 살 소년 ‘동호’입니다. 그는 군인의 총탄에 쓰러진 시신들을 수습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을 지켜보며, 점차 죽음이라는 공포와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 듭니다. 동호는 끝내 군인의 총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의 시선은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관통하며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나는 이 동호의 시선을 통해, 역사 속에 무수히 스러져 간 이름 없는 존재들이 문학 속에서 기억되고 말해질 수 있는 존재로 되살아난다는 점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설은 단지 동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각의 장은 동호와 연결된 인물들의 고통을 따라가며 구성됩니다. 동호의 친구 정대, 그를 도왔던 여자 교사, 체포되었던 인쇄소 직원, 고문을 견딘 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안고 사는 인물들까지. 이들은 모두 5월 광주에서 ‘무언가’를 잃었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끊임없이 고통받습니다.
2. 기억과 증언의 윤리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말해지지 못한 고통’에 대한 서술이 었습니다. 많은 등장인물들은 고문과 살해의 경험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기억, 몸의 반응, 꿈속의 장면들로만 그 기억을 더듬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고통을 누군가가 들어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입니다. 한강은 이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언어로 옮기면서도, 결코 감정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의 구체성과 무게를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독자가 그 참혹함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점은, 이 고통이 단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로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공동체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아니야”라는 독백 속에는 단순한 절망이 아닌,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존재의 깊은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한강은 이 지점에서, 단지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이 피해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인간으로서의 감각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 또한 끝없는 희생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문학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역사를 증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건의 연대기를 보여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한강은 인물들의 심리와 고통을 철저히 파고들어, 독자가 그 고통을 ‘감각’하게 만듭니다. 문학은 때로 뉴스보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깊이 한 사건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소년이 온다』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고통을 감상적인 정서로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불편하게 느끼고 마주보게 만듭니다. 나는 그 불편함 속에서야말로 진실이 움트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3. 존엄성과 인간됨의 회복
또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기억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말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소년이 온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년 동호는 죽었지만, 이 소설 안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우리를 광주의 한복판으로 이끌고, 그곳에서 우리가 외면했던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됩니다.
『소년이 온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록이자,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학적 질문입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날 광주에 있었던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며,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결국 『소년이 온다』는 말합니다.
죽은 자가 묻는다. "너는 괜찮니?"
살아남은 자는 침묵합니다. 그 침묵은 죄책감이자 연대입니다.
우리는 그 침묵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진실한 애도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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