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폭력과 침묵의 상처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분단과 국가 폭력, 상처 입은 존재들의 침묵과 기억을 고요하게 응시합니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한 통찰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더욱 차분하고, 섬세하며, 기록과 기억 사이의 간극을 조심스럽게 메우려는 시도가 돋보입니다.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이념 갈등과 분단 체제, 그리고 국가권력의 억압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고 위험 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처럼 말해질 수 없었던 역사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역사 앞에 서 있는 개인의 고통과 책임을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 '경하'다. 그녀는 친구 인선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후, 그의 어머니를 찾아 제주로 향합니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 기록과 기억을 오가며 진행되고, 경하의 시선을 통해 제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나는 이 과정을 따라가며,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나 보도를 넘어서, 문학만이 가능하게 하는 정서적 증언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 기억과 기록의 윤리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소설이 폭력을 단순히 고발하거나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폭력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방식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4·3사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이는 떠남으로써, 또 어떤 이는 계속해서 기억하려 애쓰는 방식으로 그 시간을 견딥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인물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입니다. 그녀는 말이 거의 없고, 표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며 증언처럼 느껴 졌습니다.
정심은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도 살아남은 자로서 말없이 삶을 이어갑니다. 그녀가 지나온 세월은 어떤 설명이나 수식보다도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한강은 이 인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존재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비명도, 분노도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의 지속이자 저항이라는 사실을, 나는 정심을 통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얼굴, 그 침묵이 소설 전체를 압도합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기록’입니다. 경하는 과거의 기록과 증언을 수집하며 4·3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록이 항상 완전하거나 명확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기록은 때로 불완전하고, 왜곡되며, 누락되기도 합니다. 한강은 이를 통해 ‘기억’이라는 개인의 경험과 ‘기록’이라는 공적 사실 사이의 긴장을 섬세하게 짚습니다. 그리고 문학은 바로 그 간극 속에서 진실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문학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합니다. 작가는 역사 앞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녀는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왜곡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역사적 폭력의 뿌리 깊은 구조를 질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무엇이 있었는가’를 넘어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3. 존엄과 존재의 회복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여러 겹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자는 작별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말하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머물고, 또 누군가는 잊혀졌지만 누군가의 심장 속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소설은 완전한 이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읽는 내내 나는 어떤 경건함과 마주했습니다.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기보다는, 기억하게 하고, 책임감을 느끼게 하며, 조용히 오래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한강 문학의 힘이며, 『작별하지 않는다』가 가진 진정한 울림입니다. 문학이란 단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 속에 붙잡고, 말해지지 못한 진실을 꺼내어 조용히 껴안는 일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증명해 보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소설입니다. 이는 비단 과거를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성찰이자,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한강은 말합니다. 고통은 지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고통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문학이 단지 감동을 주는 예술이 아니라, 진실을 붙잡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윤리적 행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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