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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언어 — 희랍어 시간

by 민트웨일 2025.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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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도서 사진
첨부사진 : 교보문고

1. 침묵과 상처의 언어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침묵과 상처, 언어의 경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작가 자신의 내면을 담은 산문으로, 삶의 결, 고통의 흔적, 언어에 대한 끝없는 사유를 담담하고도 시리게 그려냅니다. ‘희랍어라는 먼 언어는 단순한 학습 대상이 아니라, 말의 기원을 되묻고 존재의 본질을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처럼 작용합니다.

 

희랍어 시간은 언어 이전의 감각,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고통을 탐색하는 책입니다. 작가는 책 곳곳에서 말합니다. “나는 말할 수 없었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고백은 단지 과묵함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고통이 언어로 환원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한강은 어머니의 죽음, 가족의 상처, 사회적 폭력과 억압, 그리고 스스로의 신체적 고통까지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바라봅니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 번역되지 않는 슬픔은 그녀가 희랍어라는 고대어에 이끌리게 만듭니다. 희랍어는 그녀에게 이미 사라진 언어, 그러나 뼈처럼 남은말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말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 순수하고, 더 깊이 내면에 닿을 수 있는 말이 됩니다.

작가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감정의 층위를 탐색하며, 침묵의 가치를 부각합니다.

말은 때로 진실을 왜곡하거나, 고통을 희석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그녀는 침묵을 통해 오히려 더 깊은 사유와 감각에 다가갑니다.

 

희랍어는 그녀에게 현재의 언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조용히 꺼내줄 수 있는 언어의 다른 차원이 됩니다.

 

2. 존재를 지탱하는 문장들

한강의 문장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는 분노, 연민, 체념, 사유가 조심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희랍어 시간에서도 그녀는 문장 하나하나에 숨을 불어넣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그녀에게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며, 존재를 구성하는 기초가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앓은 병과 수술 후의 회복기를 언급하며, “고통은 말로 구조화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쓰고, 또 씁니다. 쓰는 행위는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고집이자 절망의 저항입니다. ‘희랍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고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 이전의 존재의 고요함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희랍어를 쓰고 발음하는 과정은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정비하는 방식입니다.

그녀는 몸의 감각을 언어와 연결시키며, 고통의 흔적을 다시 말하기로 전환합니다.

물리적인 고통조차 언어로 구체화하지 못할 때, 오히려 손으로 쓰는 희랍어라는 행위가 치료적이며 상징적인 작용을 합니다.

 

3. 언어 이전의 감각과 기억

책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바로 기억입니다. 기억은 그녀의 문장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단절된 순간들, 식물 같은 존재로 살아간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따뜻했던 손길. 이 모든 것들은 희랍어 문장들과 어우러져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냅니다.

 

희랍어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고 쓰면서, 그녀는 기억의 저편에 숨겨진 자아를 천천히 호출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자아의 작고 묵직한 발아(發芽)입니다. 이 책에서의 희랍어 시간은 단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조율하고, 생의 맥을 다시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희랍어를 배우는 행위는 기억과 감정, 상처를 천천히 환기시키는 과정입니다.

잊힌 감정이나 단절된 기억들이 언어와 만나 살아나며,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재탄생에 가깝습니다.

한강에게 언어는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육화 된 감각입니다. 글자는 그녀에게 몸의 언어이며, 말보다 더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4. 고요한 물성의 미학

한강은 책 내내 언어가 지닌 물성과 소리, 감각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녀에게 말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손끝에 닿고, 귀에 스며드는 감각적 존재입니다. 그녀는 언어를 과 같이 느끼고, 문장을 통해 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희랍어는 그 물성에 있어 이상적인 매개입니다. 알파벳 하나하나를 손으로 쓰는 과정, 사전을 찾아 어원을 추적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물리적 감각이며, 감정의 발현입니다. 한강은 그 과정을 통해, 고통스러운 과거와의 화해, 잃어버린 말들의 회복을 천천히 이뤄냅니다.

 

5. 말이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나의 진실

이 책은 단순히 한 작가가 고대어를 배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이 멈추는 지점에서, 다시 존재를 바라보려는 간절한 시도입니다. 언어를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 너머를 감각하려는 정직한 태도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은 언젠가 사라지고 침묵이 우리를 감쌀지라도, 그 사이사이에 고요히 살아남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우리를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틉니다. 희랍어 시간은 그러한 믿음을 가장 단정하고 아름답게 전달하는 책이며,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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