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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을 향한 침묵의 저항 — 『채식주의자』를 읽고

by 민트웨일 202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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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도서 사진
첨부사진 : 교보문고

 

1. 존엄은 정상성에 갇히지 않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지를 묵직하게 묻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의 이야기가 아니라,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짓밟히는 한 존재가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그립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한강이 말하고자 한 인간 존엄성의 본질은 사회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존재 자체의 가치와 자기 결정권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합니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내면적 폭발이며, 오랜 시간 축적된 억압과 불안, 죄책감, 고통이 표출된 결과입니다. 영혜는 꿈속에서 피를 뒤집어쓴 육식의 이미지를 보고 나서 자신이 더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변덕으로 치부하고, 가족들은 이를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규정하며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탁 위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자율성과 의지, 즉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가장 일상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존엄

한강은 영혜의 내면을 거의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전달됩니다. 이는 마치 현실 속에서도 여성, 특히 침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무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장치입니다. 영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무력감이 아니라, 세상의 언어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침묵입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강한 저항의 의지를 느꼈습니다. 말 대신 몸으로, 식물로 존재하려는 그녀의 선택은 고통스럽지만 진지한 존엄의 선언이었습니다.

 

3. 타인의 욕망 속에 지워지는 존엄

특히 두 번째 장 몽고반점은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타인의 욕망에 의해 철저히 침해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영혜의 형부는 예술가라는 이름 아래 그녀의 몸을 대상화하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정당화합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영혜는 이 상황에서도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응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존엄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말 없는 저항으로 느껴졌습니다.

 

4. 존엄은 비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세 번째 장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가 인간으로서의 삶마저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그녀는 물을 마시고 햇빛을 갈구하며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이는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을 끊는 결정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한강은 이 극단적인 선택조차도 존엄한 자기 결정의 결과로 제시합니다. 정신병원에서 강제로 억제당하면서도 그녀는 끝내 자신의 몸을 지키려 합니다. 타인이 보기에 그것은 광기일 수 있지만, 작가의 시선은 끝까지 영혜의 선택을 부정하거나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장면은 오히려 경건하고 숭고하게 그려집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작가가 말하고자 한 존엄성의 핵심을 마주했습니다. 존엄이란 타인이 규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지켜내는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한강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강렬합니다. 그녀는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그 안에 침묵과 시적 감수성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간 존재를 그녀는 함부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지키려는 존재의 고군분투를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특히, 그녀는 사회적으로 정상이라 여겨지는 기준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그 기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존엄을 짓밟는지를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채식주의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존엄은 고요하고 외로운 선택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의 이해나 사회의 인정 없이도, 한 개인이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순간 그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가장 인간답다고, 한강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채식주의자는 불편하고 아프지만 반드시 읽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는 침묵 속에서 울부짖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으며,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우는 문학적 통찰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세워질 수 있는지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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